백제 사비시대 여행을 떠나 볼까요. 웅진보다 넓고 교류하기도 쉬운 위치인 사비로 천도한 백제는 새로운 부흥을 꿈꿨지만, 결국 700년을 이어오던 나라는 사비시대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성과 웅진에 비해 후기라 비교적 많은 유적지와 유물이 남아 있어 백제 역사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부여로 떠나봅니다.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에 있는 역사 유적 지구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능산리사지, 의자왕을 비롯한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부여왕릉원, 백제 멸망의 흔적을 품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낙화암 등을 둘러보는 알찬 부여 역사 여행을 계획해 보세요.

1. 한강을 빼앗긴 백제 왕권의 약화
고구려 장수왕이 직접 3만의 군대를 끌고 나선 백제 침입 당시 개로왕이 죽고 500년 수도 한성을 잃은 백제는 왕권이 급속히 약해집니다. 개로왕의 아들인 문주왕은 475년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왕이 연이어 피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긴 환란의 시대를 지나 부흥의 기운을 일으킨 무령왕이 등장했고, 그의 아들 성왕이 본격적인 중흥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백제 성왕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 '지혜와 식견이 뛰어났으며 일을 잘 결단했다'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비좁은 땅인 웅진에서 현재 부여인 사비로 다시 수도를 옮깁니다. 사비는 금강 유역의 넓은 평야 지대에 있어 경제적으로 유리한 점이 많고, 바닷길을 통한 해외 진출에도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성왕은 부여를 계승했다는 의미로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국가 조직을 정비합니다. 신라와 중국 남조와도 교류하고 불교를 장려해 왜(일본)에 노리사치계를 보내 불경과 불상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2.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성왕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친선을 맺고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마침내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때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했지만, 동맹을 깨버린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공격을 받아 그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이에 성왕은 복수를 결심하며 신라 공격에 나섭니다. 이때 신라 관산성(현재 충청북도 옥천)을 공격하던 왕자 창이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에 5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격려차 나섰지만, 왕이 직접 전장에 온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의 매복 군대에게 잡히고 맙니다.
이렇게 사로잡힌 성왕을 가장 비천한 신분이며 '천한 노복'이라 부르던 고도(말먹이꾼이라고 알려져 있음)에게 목을 베게 해 엄청난 모욕을 주고, 심지어 성왕의 목을 백제에 돌려주지 않고 경주로 가져와 관청 계단 아래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고 백제가 대패하게 되었다는 죄책감으로 왕위를 거부하기까지 한 태자 창은 이후 왕위에 올라 나라를 재정비하고, 사후 위덕왕이라 불립니다. 이후 백제는 660년 멸망 때까지 사비시대를 이어가게 됩니다.

3. 백제 사비시대 역사 여행지 둘러보기
부여 역사 여행을 왔다면 필수 여행지인 국립부여박물관 이외에도 사비시대에 관련된 여러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그중 부여왕릉원, 나성, 정림사지,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 부여왕릉원 (능산리고분군, 백제 역사 유적 지구)
백제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이곳은 고구려의 웅장함과 신라의 화려함은 없지만 소박하면서도 담백한 느낌이 듭니다.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그냥 방치되기도 했으며, 지금도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거의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 동하총: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이 있는 사신도와 연꽃구름 모양의 천장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 무덤과 같은 양식이라 두 나라 사이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줍니다.
- 의자왕의 무덤: 비록 가묘이지만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무덤이 눈길을 끕니다. 당나라로 압송된 후 병사한 의자왕의 묘역으로 추정되는 중국 낙양의 흙을 가져와 이곳에 모셨습니다. 옆에는 태자 부여융의 무덤도 함께 있습니다.
2) 능산리사지
백제시대 절터 유적으로,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인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 양식을 보여줍니다.
- 성격: 왕실에서 왕릉의 축원을 빌기 위해 세운 국가 사찰로 짐작됩니다.
- 주요 출토품: 이곳 공방 터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재인 백제금동대향로와 백제창왕명사리감이 발견되었습니다.
3) 부여 나성 (백제 역사 유적 지구)
사비를 끼고 흐르는 금강은 서남쪽 방향을 방어하는 천연 해자 역할을 했고, 동과 북쪽 방향으로는 자연 지형을 이용해 인공적인 방어 시설인 나성을 설치했습니다. 중요 외곽 방어 시설인 부여 나성은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도시 외곽 성 중 최초의 것으로 538년 전후에 쌓은 것입니다. 총 6km에 달하는 나성은 도시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도시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합니다.
4) 정림사지 &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 역사 유적 지구)
사비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지로 1,400여 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고려시대에 만든 석조여래좌상, 복원된 연못, 옛 강당 터가 남아 있습니다. 함께 있는 박물관에서는 정림사지석탑의 축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모형과 함께 백제불교역사실이 있습니다.
주변보다 지대가 높아 사비도성 어디에서나 바라볼 수 있었던 정림사는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성을 옮긴 직후 건축된 백제 왕성의 대표 사찰로 백성들의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했습니다. 계획도시 사비도성에서 왕궁에서 일직선상에 놓인 정림사의 위치로 보아 사찰의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이 '정림사'라는 이름의 사찰이라는 것은 1990년대 발굴 조사 중 '정림사'라고 적혀 있는 기와 조각을 발견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려시대 이름으로 백제시대 이름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정림사지 건물 터의 기단을 보면 기와를 이용해 쌓은 아름다운 와적기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비시대 건축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뒤편 전각에 있는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재 불상 위치가 백제시대 사찰의 강당 자리입니다.
국보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탑이지만 목조 건축 양식을 본떠 만든 것으로, 삼국시대 3대 석탑 중 하나입니다. 또한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제 탑이기도 합니다. 한 번도 해체되지 않고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석탑은 지붕 끝부분이 살짝 올라가 있어 날렵하면서도 가지런해 보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비율은 백제 석탑의 균형미와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망국의 아픈 역사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탑에 남은 그을린 자국으로, 백제 멸망 당시 사비는 일주일 이상 전 도시가 계속 불타올랐는데, 그때의 그을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합니다. 또 하나는 탑에 새겨진 글자로 백제를 치기 위해 왔던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곳에 자신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기쁨에 찬 글을 남긴 것입니다. 탑의 역사를 몰랐을 당시 한때 소정방이 세운 '평제탑'이라 부른 적도 있다 하니 역사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한 번 느끼는 순간입니다.

5) 궁남지
'궁원 남쪽에 연못을 팠다'라는 '삼국사기' 기록으로 궁남지라 불립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며, 중심에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습니다. 무왕이 사랑하는 왕비 선화공주의 향수를 달래주려고 이곳을 만든 후 배를 띄우고 같이 시간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담긴 곳이기도 합니다. 무왕은 궁궐 남쪽에 정원과 연못을 만들었으며 현재 규모는 당시보다 많이 축소되었지만, 왕실 정원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장소입니다. 백제 정원 조성 기술은 신라와 일본에도 영향을 크게 주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흔적은 이곳 궁남지뿐입니다. 평소에 산책하거나 나룻배를 타면서 둘러보기도 좋고, 매년 7월 연꽃이 활짝 필 때 부여서동연꽃축제가 열려 서동과 선화의 퍼레이드 등 여러 이벤트가 열리기도 합니다.
6) 관북리 유적 (백제 역사 유적 지구)
백제 왕궁 터로 추정되는 관북리 백제 유적은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있습니다. 1980년대 발굴 조사 당시 동서가 긴 형태의 정교하게 만든 백제시대 연못이 발견되었는데, 장석을 이용해 만든 연못 내부에서 많은 연꽃무늬 수막새와 금동제 귀고리, 토기, 등잔, 나무판에 글씨를 쓴 목간, 등잔, 대바구니, 칠기 등 백제시대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연못에서 발견된 목간은 백제시대 것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며, 당나라 동전인 개원통보가 발견되어 연못을 언제 만들었는지 짐작하는 참고가 되었습니다. 또 대형 전각 건물 터, 도로 유적, 하수도, 목곽 저장고, 석곽 저장고, 공방 시설 등이 발견되어 이 일대가 백제 사비시대 왕궁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주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관아가 자리했으며, 1869년에 건축된 동헌과 객사, 내동헌 등이 남아 있습니다.
7) 부소산성 (백제 역사 유적 지구)
1970년대 금강 상수도 공사를 하던 중 성벽의 일부 벽면이 드러나면서 발굴된 부소산성은 백제시대 도성인 사비를 방어하던 핵심 시설로 이중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궁궐 후원으로 사용되었고, 전쟁이나 유사시에는 도성의 방어 거점이 되었습니다. 대부분 흙으로 다져 만든 토성인 부소산성은 군창지와 사자루 산봉우리를 머리띠 두르듯 쌓은 테뫼식 산성과 이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 함께 있는 산성입니다. 여기서 포곡식 산성은 백제시대 것이고 테뫼식 산성은 통일신라시대 당시에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내부에는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인 송월대에 있는 사자루, 부여 시가지와 백마강이 보이는 반월루, 삼천궁녀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인 궁녀사 등이 있으며, 낙화암과 고란사 또한 포함돼 있어 꼭 둘러볼 장소입니다.
8) 낙화암 & 고란사
당의 군대가 사비성에 이르고 웅진 공산성에 피해서 있던 의자왕이 나와 항복하면서 660년 백제는 멸망합니다. 백마강이 보이는 절벽 위에는 의자왕의 삼천궁녀가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강에 몸을 던졌다는 낙화암이 있고, 그 위에 조그마한 육각형 정자인 백화정이 있습니다. 궁녀들이 몸을 던질 때 그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이 보였다는 의미에서 ‘낙화(落花)’라고 부르게 되었고, 바위 밑 ‘낙화암’이라고 새겨진 글씨는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 중 한 명인 우암 송시열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천궁녀를 거느리며 향락을 즐겼다는 의자왕 이야기는 너무 과장된 것으로, 의자왕의 무능력과 부패함을 강조하려는 승자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가에 있는 고란사는 백제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짐작되며, 현재 사찰은 낙화암에서 몸을 던진 여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1028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고란사는 우리나라에서 이곳에서만 자란다는 신비한 약초인 고란초와 고란 약수로 유명한데, 약수를 마시면 젊어진다는 이야기가 내려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