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석탑이 있는 미륵사는 백제 무왕 당시 건축된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입니다. 현재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서탑과 재건된 동탑만 서 있는 터만 남았지만 중요한 백제 유적지 중 하나입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미륵사 창건 이야기에는 무왕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2020년에 새롭게 건축해 재개관한 국립익산박물관은 미륵사지에서 수습한 1만 9,000여 점의 문화재와 미륵사지 석탑의 사리장엄구를 비롯해 익산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을 소장·전시하고 있습니다.

1.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
백제시대 건축물인 국보 미륵사지 석탑은 외부에서만 감상할 수 있지만, 현대에 복원한 동탑에서는 계단을 올라 1층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탑을 모델로 해서 복원한 것이라 궁금했던 탑 내부 모습을 알 수 있죠. 서탑이 보이는 문에서는 탑과 함께 사진을 찍기에도 좋습니다.
미륵사는 백제 30대 왕 무왕이 왕권 강화와 국력 신장을 위해 건축한 동양 최대 규모의 사찰(약 10만 평)이었으나, 안타깝게도 17세기 조선 후기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라의 침략을 막는 데 불교의 힘을 빌리고자 건축한 호국사찰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큰 곳입니다. 국립익산박물관에 있는 미륵사 경내 미니어처를 보면 당시 웅장했던 사찰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미륵사, 누가 어떻게 세웠나?
무왕이 세운 미륵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과 왕비(선화공주)가 함께 현재 미륵산인 용화산에 있던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던 중 산 밑 연못 속에서 나타난 미륵삼존을 보고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미륵삼존을 본 선화공주가 그곳에 큰 절을 세우자고 하니, 왕이 허락해 지명법사(무왕의 장인인 신라 진평왕에게 도력을 이용해 하룻밤에 금을 보내주었던 승려)에게 연못을 메울 것을 물었고, 이에 법사는 이번에도 도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허물어 평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미륵사지는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원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3. 미륵사 가람배치
가람배치(伽藍配置)란 사찰 건축의 형식, 정형화된 공간 배치를 뜻합니다. 사찰 내에 있는 건물인 금당, 탑, 문, 회랑, 강당, 종루, 경루, 승방 등의 위치와 서로의 거리 등의 규칙성을 이야기하는 거죠. 무왕 당시 미륵사는 가운데 목탑을 두고 동쪽과 서쪽 양쪽에 석탑을 만들어 총 3개의 탑을 만듭니다. 중앙 목탑 뒤에 각각 중앙 건물인 금당을 비롯한 법당을 만들고 회랑(복도)으로 구획한 3탑 3금당 가람배치를 했습니다. 보통 백제의 가람배치는 1탑 1금당 형식인데, 미륵사는 매우 독특한 배치입니다.
미륵사와 같은 3탑 3금당의 가람배치는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이 출현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현한 것으로, 백제 건축 장인의 대단한 아이디어를 알 수 있습니다. 금당 규모는 앞면이 5칸, 옆면이 4칸이며 바닥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에 대비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 뒤쪽으로는 승방과 함께 거대한 강당이 있던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4. 미륵사 둘러보기
미륵사지에서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기와류와 더불어 토기, 금속, 목재 등 약 1만 9,000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습니다. 유물은 국립익산박물관 등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꼭 함께 둘러보세요.
1) 당간지주
절에서 행사나 의식을 거행할 때 걸어두는 깃발을 당(幢)이라 하고, 이것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합니다. 지주는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말합니다. 당간지주는 신성한 구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삼한시대부터 내려온 '솟대'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합니다. 미륵사지에서는 2기의 지주가 약 90m 간격을 두고 있는데, 크기와 양식 등이 같아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 중기 이후에 만든 것으로 짐작됩니다. 지주 안쪽 면에 뚫어놓은 3개의 구멍은 당간을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기 위해서였는데, 맨 위의 것은 직사각형이고 나머지는 둥근 모양입니다. 당간지주 앞 2개의 연못은 당간지주와 함께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입니다.
2) 미륵사지 석탑(서탑)
사찰에서 탑은 부처님의 신골(身骨)인 사리를 모시는 장소입니다. 국보인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규모가 가장 크며 창건 시기가 명확한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3개의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으로 목탑을 만드는 형식에 따라 원래는 9층탑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석탑은 반파된 상태로 6층 일부만 남아 창건 당시 정확한 원형은 알 수 없지만,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남아 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6.2m이며 2층으로 구성된 기단 전체 폭은 약 12.5m입니다. 1층 각 면은 3칸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했습니다.
또 석탑 1층 내부에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통하는 십자형 통로가 있습니다. 18세기 이전 1층 둘레 석축이 보강되고 1915년 일제강점기 당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했던 것을 2001년부터 해체 보수해 2017년 최종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보수 공사 중 1층 심주석 상면의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 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리장엄구란 글자 그대로 사리를 장엄하고 엄숙하게 치장해 모신 일체의 물건을 뜻합니다. 이곳에서는 금제 사리봉영기, 은제사리병, 금제 소형 판, 청동합, 칼, 금괴, 금석,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어 많은 화제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리봉영기의 '기해년에 백제 무왕의 왕비 사택적덕의 딸이 발원해 세웠다'라는 기록을 통해 석탑을 건립한 연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3) 목탑지 & 동탑
중앙에 있던 목탑 자리로 기초 부분 바닥에 습지의 개흙이 있어 '삼국유사' 기록대로 연못을 메우고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굴 조사 당시 기단 앞에서 출토된 불에 탄 기와들을 통해 이곳 목탑이 통일신라 후기에 화재로 파괴되었음이 밝혀졌습니다.
1974년에 동탑 터를 발굴한 후 서탑과 함께 나란히 탑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후 서탑을 모델로 해 1992년에 복원이 완료되었습니다. 탑 높이는 총 27.8m로 탑에 달린 풍탁(건물이나 석탑 처마에 달아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은 탑지에서 출토된 백제 금동풍탁을 복제한 것입니다. 동탑은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4)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해서 '광명등 光明燈'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미륵사에는 석등 받침돌의 일부가 2기 남아 있습니다. 하나는 동쪽의 새로 복원한 석탑과 법당 터 사이에, 또 다른 것은 중앙 목탑 터와 법당 터 사이에 있습니다. 현재 3단 받침돌 중 아래 받침돌만 남아 있는데, 윗면에 8잎의 연꽃을 두른 후 그 사이에 작은 잎을 조각해 두었습니다. 연꽃무늬 모습이 절터에서 발견된 연꽃 문양 수막새와 비슷하고 위치가 원래 자리인 것으로 보아 창건 당시인 백제 무왕 때 작품으로 짐작됩니다. 온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당시 높이는 2.7m 정도로 짐작됩니다.
5) 금당지
사찰의 핵심적인 건물로 불상을 모신 건물입니다. '삼국유사'에 미륵삼존이 나타나 금당을 세 곳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 발굴한 결과 삼원의 가람 속에 각각 금당이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각 금당에는 지하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죽은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었고, 이 용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경주 감은사 금당에 지하 공간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아 무왕의 아버지가 용이었다는 설화에 따른 용 신앙과 관련된 것이라 짐작하기도 합니다.
6) 강당지
법회와 같은 불교 의식과 더불어 여러 승려와 신도가 모여 불경을 강의하고 설법했던 장소입니다. 동서 65.6m, 남북 9.8m로 규모가 크고, 강당지 북쪽 중앙에는 복승방지로 연결되는 복도 시설로 보이는 기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백제시대 석조 기단 건물 중 가장 크면서도 완벽한 상태로 보존되어 당시 기단의 축조 기법을 알 수 있습니다.
7) 승방지
승방은 스님들이 생활하는 공간입니다. 미륵사에는 북·동·서원 승방지가 있으며, 특히 북승방지는 정면 133.4m, 폭 14m로 미륵사지에서 단일 건물 터로는 가장 규모가 큽니다. 또 동원승방지에서는 구들과 아궁이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