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을 벽돌 모양으로 만들어 쌓은 분황사지 모전석탑, 천마총과 황남대총이 있는 대릉원,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 야경이 아름다운 동궁과 월지는 경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입니다. 목련과 벚꽃이 피는 봄에는 주변 풍경이 특히 예뻐서 가족 여행지로도 그만인 경주로 함께 떠나 볼까요.

1. 신라 건국 초기에는 박·석·김
신라는 경주 토착 세력과 고조선이 멸망한 후 남쪽으로 온 이주민이 연합한 나라로, 초기에는 6부족 연맹체였고 박·석·김 세 성씨에서 왕이 선출됩니다. 각기 박혁거세, 석탈해, 김알지가 세 집단의 선조입니다. 박혁거세와 석탈해는 알에서 태어난 신화를 가지고 있고, 김알지는 '금궤에서 나온 아이'라 하여 성을 '김'이라 했습니다. 김알지는 경주 김 씨의 시조이기도 합니다.
356년에 즉위한 내물왕은 402년까지 왕위에 머물며 오랫동안 신라를 다스립니다. 내물왕 시대에 낙동강 동쪽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한 신라는 고대국가로 자리 잡았고, 이때부터 김씨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됩니다. 신라의 왕호는 귀인을 뜻하는 거서간, 무당을 뜻하는 차차웅, 연장자를 뜻하는 이사금을 거쳐 내물왕 시대에 마립간이 되었습니다. 이후 6세기 지증왕 시대에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2. 지증왕과 법흥왕
신라 발전의 기초를 닦은 지증왕(재위 500~514)은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羅德業日新 網羅四方之義)'는 뜻을 담아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왕의 명칭을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이사부를 보내 현재 울릉도인 우산국을 정복하고 악습인 순장을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지증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법흥왕(재위 514~540)도 아버지를 뛰어넘는 많은 업적을 이룩합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신라의 법과 체계를 수립하고 다듬었으며, 율령을 반포하고 17관등제와 관리의 공복을 정합니다. 또 금관가야를 정복해 영토를 확장하고, 신라가 중국과 대등한 나라임을 강조하고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귀족 회의를 이끌 상대등을 설치하고 골품제를 정비합니다.
성골끼리만 결혼했던 골품제로 법흥왕의 외손자이자 친조카인 진흥왕(재위 540~576)은 갓 스물이 넘었을 때 백제 성왕과 협력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점령합니다. 하지만 둘의 동맹은 곧 진흥왕의 배신으로 깨지고 말았고, 성왕을 죽인 후 두 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됩니다. 그는 화랑을 국가적 조직으로 개편해 인재를 양성했고, 영토 확장에 힘써 한강 유역을 비롯한 한반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또 불교 교단을 정비하고 중국과의 교류 확대 등을 통해 번영을 이끌어내며 스스로를 '태왕'이라 칭합니다.

3. 경주 둘러보기 - 분황사지 모전석탑
왕실의 호국 사찰이었던 분황사는 지금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창건 당시에는 황룡사 못지않은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곳에 있는 분황사지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만든 형태로, 634년 선덕여왕 당시 사찰과 함께 세워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현재는 3층까지만 남아 있고, 탑의 기단 네 모퉁이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가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입니다. 분황사는 자장율사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며, 특히 원효대사는 이곳에 머물며 '화엄경소'와 '금강삼매경소' 등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분황사에는 신라 때부터 우물로 쓴 돌우물이 있는데, 신라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우물 속에 살며 나라를 지키던 호국용 세 마리를 물고기로 둔갑시켜 당나라로 빼돌리려 했으나 다행히도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물 이름이 '삼룡변어정'이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사용하는 우물로 지금까지 물이 마른 적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4. 경주 둘러보기 - 황룡사지
신라 최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는 남아 있는 광활한 터만 보더라도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갈 정도입니다. 백제 장인 아비지가 만든 224척 높이의 구층목탑과 신라 3대 보물로 꼽히던 장육존상불상, 금당에는 '벽에 그려진 소나무에 새가 앉으려다 벽에 부딪혀 죽었다'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솔거의 벽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238년 몽골이 침입해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흔적만 남아 있는 곳이지만 발굴 당시에 4만 점이 넘는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높이 1.8m의 대형 치미는 황룡사 건물의 위용을 짐작하게 합니다.
1) 황룡사 구층목탑
선덕여왕 당시 백제 건축 기술자인 아비지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으로, 층마다 신라를 에워싼 적을 상징합니다. 1층부터 왜, 당, 오월, 탐라, 백제, 말갈, 거란, 여진, 고구려를 뜻하며, 이들 나라로부터 신라를 지키고 정복하겠다는 호국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탐라는 현재의 제주도인데, 이런 작은 섬나라에도 위협을 느꼈다니 당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신라의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돌인 심초석만 보더라도 탑의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심초석은 가로 4m, 세로 3m, 무게 30톤에 달해 이것을 보면 황룡사 구층목탑의 높이는 80m, 현재 아파트 높이로 20층이 훨씬 넘는 높이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탑의 한 변 길이는 사방 22.2m로 목탑 터 바닥 면적만 약 495㎡(150여 평)에 달합니다.
2) 장육삼존불상
진흥왕은 576년 재위 37년 되던 해 가을에 세상을 떠났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모두 그가 죽기 한 해 전 황룡사 장육삼존불상(丈六三尊佛像)이 눈물을 흘리며 왕의 죽음을 예고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장육삼존불상은 진흥왕 때 만들었는데, 가운데는 석가불, 좌우로는 문수와 보현보살상이 있었다고 추정됩니다. 석가불에만 금이 1만 198분, 구리 3만 5,007근이 들어갔다고 하며 크기가 1장 6척으로 4.5~5m의 커다란 금불상입니다. 금 1돈이 10푼으로 불상에 들어간 금은 약 1,020돈이며, 금의 가치는 계속 변하지만 현재 1돈 가격을 기준으로 계산해 보면 최소 2억 원 이상의 금이 사용된 것입니다.

5. 경주 둘러보기 - 대릉원
경주 여행의 필수 코스인 대릉원은 신라 왕과 귀족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대릉원'이라는 이름은 '미추왕을 대릉에 장사 지냈다'라는 '삼국유사' 기록에서 유래했습니다. 23기의 무덤이 모여 있는 대릉원에 들어서면 당시 신라 지배층의 강력한 권력을 잘 보여주는 각 무덤의 큰 규모에 우선 놀라게 됩니다. 봄에는 미추왕릉 주변에 흰 목련 꽃이 유명하고 숲길을 따라 산책하기도 좋아 아이들과 함께 둘러보기에 그만입니다. 대릉원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곳은 바로 황남대총과 천마총으로, 두 곳에서 발굴된 엄청난 유물들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은 대부분의 무덤이 도굴당하는 와중에도 안전했는데, 그 이유는 도굴이 어려웠던 돌무지 덧널무덤이었기 때문입니다. 돌무지 덧널무덤은 나무로 된 덧널 위에 많은 양의 돌을 쌓아 올린 후 그 위를 흙으로 덮은 무덤입니다. 벽화는 그릴 수 없는 구조지만 대신 부장품은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던 거죠.
1) 천마총
내부를 개방해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며 복사품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천마도를 볼 수 있습니다.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천마총'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말안장 양쪽에 달아 옷에 진흙이 묻지 않게 했던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장니(다래)에 천마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진 '천마도 장니'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신라시대 회화가 발견된 것이라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또 천마도 외에도 매우 섬세하게 만든 금관과 허리띠 등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 동물은 천마가 아닌 '기린'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데, 만약 사실이라면 천마도, 천마총이 아니라 기린도, 기린총으로 바뀔 수도 있겠습니다.
2) 황남대총
쌍둥이 산 모양으로 부부의 무덤으로 짐작되는 황남대총은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해 외부에서만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릉원뿐 아니라 신라 고분 중 규모가 가장 큰데, 동서가 80m, 남북이 120m, 높이는 25m에 달합니다. 남편과 부인의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의 성격이 각기 달랐는데, 남편 쪽에서는 전쟁에 쓰던 무기가 많이 나왔고, 부인 무덤에서는 장신구와 생활용품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인 쪽에서 나온 유물 중 훨씬 값비싸고 귀중한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시대에는 남자 못지않은 재력을 가지고 상업 활동을 하는 여인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이 무덤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3) 대릉원 목련나무 & 돌담길
SNS에서 핫한 대릉원의 포토 존으로 고분 사이에 목련 나무가 서 있는 모습이 분위기가 너무 좋습니다. 특히 목련이 피는 이른 봄이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사진을 찍을 정도입니다. 또 봄에는 벚꽃 터널이 500m 넘게 이어지는 대릉원 돌담길도 최고의 산책로입니다.
6. 경주 둘러보기 - 첨성대
동양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하늘의 별자리와 이치를 알아 왕의 권위를 세우려 했던 선덕여왕 16년(647년)에 건축한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 天圓地方)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형으로 만든 것입니다. 높이 9m 정도로 가운데 사각형 구멍 쪽으로 사다리를 놓아 들어가면 내부에서 다시 상단부까지 사다리를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첨성대에 사용된 돌의 개수는 1년을 나타내는 362개며, 석단 수는 27단으로 맨 위 정자 모양 돌까지 합하면 28단입니다. 즉 당시 기본 별자리 28수를 뜻합니다. 여기에 기단을 합하면 29단으로 당시 한 달의 기간입니다. 몸체 중앙 창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라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니 알고 보면 엄청난 비밀을 담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춰져 있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가로질러 8방위에 맞추었으며 몸체의 창문은 정남향입니다. 이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쪽 중앙에 있을 때 태양광이 첨성대 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으며, 하지와 동짓날에는 아랫부분 광선이 없어진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