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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과 삼국 통일 -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킬 것이다

by black-richangel 2026. 5. 3.

삼국 중에서 발전이 가장 늦고 영토도 작았지만, 결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것은 신라였습니다. 더 이상 왕이 될 성골이 없자 진골 출신 최초로 왕이 된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선덕여왕 시절부터 외교를 맡아 활약하기도 합니다. 삼국 통일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 시대인 676년에 이뤄지며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은 바로 그때의 이야기를 담은 장소입니다.

 

시내에서 거리가 있는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으로 갈 때는 자차나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합니다. 우선 감은사지에서 2개의 탑과 용을 위한 통로를 만들어놓은 금당 자리를 보고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봉길대왕암해변으로 가면 됩니다. 해변을 따라 많은 식당과 카페, 편의점 등이 있고, 푸른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습니다. 자, 그럼 지금부터 함께 떠나볼까요!

 

감은사지 & 문무대왕릉 (1)

 

 

01. 삼국통일 전 - 7세기, 격동하는 동아시아 정세

6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 국제 정세는 크게 요동칩니다. 한반도에서는 진흥왕 시대에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며 삼국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중국에서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차례로 통일을 이룩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고구려와 백제는 북쪽의 돌궐과 바다 건너 왜와 연합하고 신라는 중국 대륙의 당과 연합하게 되면서 6세기 말 동아시아는 고구려-백제-왜-돌궐이 연결된 남북 세력과 신라와 수, 당이 연결된 동서 세력으로 구분됩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와 당나라는 엄청난 군대를 동원해 공격해 왔지만 절대적 열세에도 고구려는 수, 당의 침략을 잘 막아내며 민족의 방파제 역할을 합니다.

 

고구려가 수, 당의 침략을 막아내며 분투하는 와중에 한반도 남쪽에서도 전쟁이 계속됩니다. 백제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신라 전력에 아주 중요한 위치였던 대야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이에 신라는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중 대야성전투는 김춘추 개인에게 엄청난 원한을 가지게 합니다. 당시 대야성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이었는데, 마침 그곳에 있던 김춘추의 딸 고타소까지 함께 잡혀가 둘이 처형당합니다. 백제는 두 사람의 머리를 잘라 백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밑에 묻어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합니다. 여기서 백제가 너무한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원한이 맺힌 성왕의 죽음을 생각하면 백제 입장에서는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백제 성왕을 사로잡은 신라군은 왕의 머리를 베어 경주로 보냈고, 진흥왕은 이것을 관청 계단 아래 묻어 지나가는 신라 사람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02. 삼국통일 전 - 김춘추, 직접 사신으로 나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이를 갑니다. 고타소는 김춘추가 사랑했던 딸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고 사람이나 어떤 것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 “내 살아 있을 때 반드시 백제의 멸망을 보고 말 것이다”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타도 백제’를 외치면서 고구려와 왜에 군대를 요청하는 사신으로 직접 떠나는 모험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이 모험은 두 번 다 결과가 좋지 않았는데, 왜는 백제와 전통적 우방국인 데다 현재 백제 국력이 더 강한 상태라 신라를 거절했던 거죠.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김춘추에 대해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말을 잘했다’라고 기록하기도 합니다.

 

왜와 연합하는 것에 실패한 김춘추가 다음으로 간 곳은 고구려였는데, 연개소문의 죽령 이북 영토를 돌려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도 못했고 심지어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이때 선도해라는 사람이 찾아와 들려준 토끼와 거북이의 간 이야기를 참고 삼아 “저는 신라의 일개 신하라 제 마음대로 할 수 없고(즉 내 간은 신라 땅에 있다), 제가 신라로 돌아가 왕께 말씀드려 죽령 이북 땅을 고구려에 돌려드리겠습니다(일단 날 보내줘! 그럼 내가 돌아가 간을 가지고 올게!)”라 이야기해 겨우 풀려나게 됩니다.

 

감은사지 & 문무대왕릉 (2)

 

 

03. 삼국통일 전 - 당나라와 연맹을 맺은 신라

김춘추가 최후로 찾은 곳은 당나라입니다. 어린 시절을 수나라에서 보낸 김춘추는 그쪽 말을 잘했으니 설득력도 좋았을 것이고, 마침 당시 당 태종은 고구려 정복에 실패하고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져 동맹을 체결하게 된 거죠. 하지만 두 나라가 연맹을 맺은 다음 바로 백제나 고구려를 공격한 것은 아닙니다. 김춘추와 당 태종이 연맹을 맺은 다음 해 당 태종이 죽었는데, 자신의 아들(당 고종)이 미덥지 못했던 당 태종은 "절대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마라"라는 유언까지 남깁니다. 그래서 한동안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같은 긴장감을 안은 채 삼국의 시간은 흘러갑니다.

 

한동안 큰 전쟁 없이 세월이 지나가지만 그동안 왕, 즉 태종 무열왕이 된 김춘추의 설득과 당 고종의 부인이며 후에 그 유명한 측천무후가 될 황후의 강한 권유로 당나라는 전쟁에 나서게 됩니다. 당나라는 원래 백제에는 별 관심도 없었지만 백제를 먼저 멸망시켜야 고구려 침략도 쉽다는 신라의 설득으로 두 나라는 백제 공격을 먼저 계획하게 됩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에 대한 공격을 준비할 때, 백제 지배층은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방어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결사대 5,000명을 격파했고 당의 군대는 사비성에 도착해 백제를 압박합니다.

 

이에 웅진으로 피해 있던 의자왕이 나와 항복하고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660년 백제는 멸망합니다. 딸 때문에 백제에 원한이 깊었던 김춘추는 661년에 사망했으니 그의 말대로 살아생전에 백제 멸망을 보게 된 거죠. 승리를 거둔 후 백제에 입성한 무열왕은 당의 장수 소정방과 함께 위에 앉아 아래쪽에 있던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네가 감히 내 딸을 죽였단 말이냐”라며 모욕의 말을 했습니다. 무열왕의 아들이며 후에 문무왕이 되는 김법민은 태자 부여융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네 아버지가 내 누이를 부당하게 죽여 묻었으니 그로 인해 나는 20년간 슬프고 괴로웠다. 그랬는데 오늘 네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구나”라 했다고 합니다.

 

백제 멸망 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고구려는 잘 막아냅니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 아들들 사이에서 권력 다툼이 벌어지면서 고구려 역시 혼란을 거듭합니다. 결국 668년 평양성이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함락되면서 7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고구려는 멸망하고 맙니다.

 

감은사지 & 문무대왕릉 (3)

 

 

04. 삼국 통일 완성 - 신라와 당의 전쟁

백제와 고구려와의 전쟁 이후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의 수도 금성에 계림도독부까지 설치했던 당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냅니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과 힘을 모아 함께 당에 맞섭니다. 신라는 먼저 사비성을 공격해 당군을 몰아내고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후 당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지만,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신라가 대승을 거두며 당의 군대를 몰아냅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는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 땅을 확보해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룩합니다. 신라는 치열한 동아시아의 상황 속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고구려, 백제를 통합하기는 했지만, 두 가지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바로 외세인 당의 세력을 이용했다는 것과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물리친 것은 자주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후 신라는 민족 융합 정책을 실시해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수용합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평가는 학자들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매우 상반되는 의견을 보입니다. 긍정적인 평가로 안정복이 집필한 '동사강목'의 글을 살펴보겠습니다. '삼국이 대치하고 있을 때 서로 물고 뜯고 함이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민심이 난리를 싫어하니 하늘이 무열왕(김춘추)을 내려 널리 백성을 구제했다. … 김유신은 충성된 마음과 뛰어난 지략으로 통일의 공을 이루었다'라고 했습니다. 또 경주 김씨로 신라계 출신인 김부식 또한 자신이 쓴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과 김유신에 대해 긍정적으로 기록합니다.